류조지 마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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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류조지 마사이에는 1556년 류조지 다카노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 사후 가문을 이었으나 실권은 중신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있었다. 그는 아리마씨와의 관계, 규슈 평정에서의 역할, 세키가하라 전투 참여 등을 거치며 1607년 사망했다. 그의 사후 류조지 가문은 단절되고, 영지는 나베시마씨에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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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조지 마사이에 | |
---|---|
기본 정보 | |
씨명 | 용조사 씨 |
이름 | 류조지 마사에 / 친현 |
![]() | |
시대 | 전국 시대 - 에도 시대 초기 |
출생 | 고지 2년 (1556년) |
사망 | 게이초 12년 10월 2일 (1607년11월 21일) |
개명 | 조호시마루 (유명), 친현 (초명), 히사이, 마사에 |
별칭 | 타로시로 (통칭) |
계명 | 류도인덴다이운소초다이코지 |
묘소 | 사가현사가시 혼조마치의 고덴지 |
관위 | 종5위 하민부대보, 종4위 하시종, 히젠노카미 |
주군 | 도요토미 히데요시 |
가계 | |
씨족 | 용조사 씨 |
부모 | 류조지 다카노부, 류조지 가몬 딸 |
형제 | 마사에, 류조지 다카히라, 에가미 이에타네, 고토 이에노부, 타마츠루히메 |
배우자 | 아리마 요시사다 딸 |
자녀 | 아야히메, 쇼주인, 류조지 다카후사, 하타 야타로, 무라타 야스요시, 사노 마사요시, 이누즈카 이에시게, 나베시마 다카아키 실 |
기타 정보 |
2. 생애
1584년 아리마 하루노부가 류조지씨에서 배반하자 아버지 류조지 다카노부에게서 아리마 토벌 명령을 받았지만, 아내가 아리마 가문 출신이라 소극적으로 대처하여 전쟁에 불참했다. 그 결과, 류조지 다카노부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키타나와테 전투에 나섰다가 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6] 아버지의 사망으로 류조지 가문의 뒤를 이었으나, 다이묘로서의 자질이 부족하고 병약하여 국정의 실권은 중신이자 의숙부인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쥐게 되었다. 다카노부가 죽자 사기가 오른 시마즈씨 군대가 류조지 가의 거성 무라나카성(村中城)을 공격해 왔지만, 나베시마 나오시게 덕분에 시마즈 군을 물리쳤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규슈 평정을 통해 시마즈 가를 쳐부수고 류조지 가문에 히젠 7군 32만 석을 봉했다. 그러나 1590년 3월 히데요시가 은거하자, 국정의 실권은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넘어갔다.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에도 마사이에는 참전하지 않고,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출정하였다.[6]
병 때문에 마사이에는 은거했고, 1591년 11월 28일, 마사이에는 나베시마 나오시게를 양자로, 자신의 아들 다카후사를 나오시게의 양자로 삼았다.
1607년 아들 다카후사가 에도에서 일으킨 사건으로 인해 사망하고, 같은 해 마사이에도 잇따라 사망하면서 류조지 가문은 단절되었다. 32만 석의 영지는 류조지 종가가 아니라 나베시마씨(過島氏)에게 넘어갔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1556년 류조지 다카노부의 적남으로 태어났다.[1] 1561년에 원복하고, 인근의 강대한 세력 오토모 요시시게(소린)로부터 편휘 (「진」의 글자)를 받아 '''시게토모''' (통칭은 타로시로)라고 칭했다.[1] 이후 '''히사에''', '''마사이에'''로 개명했다.1578년에 아버지로부터 가독을 물려받았지만, 형식적인 가독 상속이었으며, 정치・군사의 실권은 다카노부가 계속 쥐고 있었다. 1584년에 아리마 하루노부가 류조지 씨로부터 이반하자, 아버지로부터 아리마씨 토벌을 명받았다. 그러나 정실이 아리마 씨 출신으로 이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다카노부 스스로 아리마 토벌에 나서고, 마사이에가 유수를 지켰다. 이 아리마 공격 중, 다카노부는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전사한다.
아버지의 죽음 후, 조모와 함께 국정을 행하지만, 시마즈씨가 내습한다는 유언비어가 돌아, 마사이에는 숙부인 노부치카는 숙로들과 상담하여 나베시마 나오시게를 야나가와에서 불러들였다. 또한, 다카노부의 죽음으로 기세가 오른 시마즈씨의 침공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마사이에가 시마즈씨에 항복했다.
2. 2. 가문의 쇠퇴와 나베시마 가문의 부상
1584년 류조지 다카노부가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전사한 후, 류조지 마사이에는 가문의 뒤를 이었지만, 다이묘로서의 자질이 부족하고 병약하여 국정의 실권은 중신이자 의숙인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쥐게 되었다.[6]아버지 다카노부가 죽자 사기가 오른 시마즈씨 군대가 류조지 가의 거성 무라나카성(村中城)을 공격해 왔지만,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활약으로 시마즈 군을 물리쳤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규슈 평정을 통해 시마즈 가를 쳐부수고 류조지 가문에 히젠 7군 32만 석을 봉했다. 그러나 1590년 3월 히데요시가 은거하자, 국정의 실권은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넘어갔다.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에도 마사이에는 참전하지 않고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출정하였다.[6]
병 때문에 마사이에는 은거했고, 1591년 11월 28일, 마사이에는 나베시마 나오시게를 양자로, 자신의 아들 다카후사를 나오시게의 양자로 삼았다.
1607년 아들 다카후사가 에도에서 일으킨 사건으로 인해 사망하고, 같은 해 마사이에도 잇따라 사망하면서 류조지 가문은 단절되었다. 32만 석의 영지는 류조지 종가가 아니라 나베시마씨(過島氏)에게 넘어갔다.
2. 3. 은거와 가문의 단절
1584년 아리마 하루노부가 류조지씨에서 배반하자, 아버지 류조지 다카노부에게 토벌 명령을 받았지만, 아내가 아리마 가문 출신이라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참전하지 않았다. 그 결과, 류조지 다카노부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키타나와테 전투에 나섰다가 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6] 아버지의 사망으로 류조지 가문의 뒤를 이었으나, 다이묘로서의 자질이 부족하고 병약하여 국정의 실권은 중신이자 의숙부인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쥐게 되었다.1590년 3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은거를 청하여 국정의 실권은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넘겨졌다.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에도 참전하지 않고,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대신 출정하였다.[6]
병 때문에 은거한 마사이에는 1591년 11월 28일, 나베시마 나오시게를 양자로 삼고, 아들 다카후사(죠시)를 나오시게의 양자로 삼았다.
1607년 아들 다카후사가 에도에서 처를 살해하고 자살 미수를 일으킨 사건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 같은 해 마사이에 또한 사망하면서 류조지 가문은 단절되었고, 32만 석의 영지는 류조지 종가가 아닌 나베시마씨에게 넘어갔다.
3. 인물상
규슈 평정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바둑 시합을 하여 졌는데, 바둑판을 바라보며 진 이유를 골똘히 생각하느라 히데요시가 돌아갈 때 배웅하는 것을 잊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7] 부채 모양의 인장을 사용했으며, 신분이 높은 상대에게는 주홍 인장, 낮은 상대에게는 검은 인장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사용했다.[5]
4. 족보
관계 | 이름 | 비고 |
---|---|---|
부친 | 류조지 다카노부 | 1529년 ~ 1584년 |
모친 | 류조지 이에카도의 딸 | |
정실 | 아리마 요시사다의 딸 | |
자녀(생모 불명) | 야스히메 | 모리 가쓰나가 정실 |
쇼주인 | 이사하야 나오타카 정실 | |
류조지 다카후사 | 1586년 ~ 1607년,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양자 | |
하타 야타로 | ||
무라타 야스요시 | ||
사노 마사요시 | ||
자녀(생모 불명) | 이누즈카 이에시게 | |
자녀(생모 불명) | 나베시마 다카아키의 부인 |
참조
[1]
서적
系図纂要
[2]
문서
龍造寺高房宛て豊臣秀吉朱印状写 (龍造寺藤八郎知行割之事)
公益財団法人鍋島報效会
[3]
문서
肥前国では、降伏した有馬氏の他に大村・松浦(平戸)・五島らが所領安堵されている。
[4]
서적
日本近世武家政権論
近代文芸社
[5]
서적
戦国期印章・印判状の研究
岩田書院
[6]
서적
日本近世武家政権論
近代文芸社
[7]
웹인용
戦国期印章・印判状の研究
岩田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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